1980년대와 90년대 초반의 팝 음악을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도대체 이 소리는 어떤 악기에서 나는 걸까?”

휘트니 휴스턴의 맑은 전자피아노.

유럽(Europe)의 강렬한 브라스.

엔야의 몽환적인 패드.

엔그마의 신비로운 공간감.

그 시절에는 그저 ‘좋은 소리’라고만 생각했다.

인터넷도 없었고, 악기 정보를 쉽게 찾아볼 수도 없었다. LP 속 크레딧을 유심히 보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대부분은 어떤 악기로 연주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나 역시 대학 시절 밴드 활동을 하면서 다른 학교 축제 무대를 자주 보러 다녔다. 건반 위에 놓인 Roland, Yamaha, Korg 로고가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학생이 쉽게 살 수 있는 가격이 아니었다. 그저 ‘언젠가는 한번 만져보고 싶다’는 마음만 품고 있었을 뿐이다.

세월이 흘러 하나둘 직접 구입해 보니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 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바로 그 소리가 이 악기였구나.’

오늘은 80년대 명곡을 이야기할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전설의 신디사이저 10대를 소개해 보려고 한다.

1. Yamaha DX7

80년대를 바꾼 전설

1983년에 등장한 DX7는 신디사이저 역사를 바꾼 악기다.

이전까지는 아날로그 신디사이저가 주류였지만 DX7가 등장하면서 디지털 FM 신디시스 시대가 열렸다.

대표곡

  • Whitney Houston - Greatest Love of All
  • Phil Collins - One More Night
  • Chicago - Hard Habit to Break
  • Tina Turner - What’s Love Got to Do with It

특히 Greatest Love of All의 맑고 깨끗한 일렉트릭 피아노는 DX7를 대표하는 사운드 가운데 하나다.

지금 들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실제로 DX7를 구입하고 가장 먼저 눌러 본 음색도 바로 이 EP 사운드였다.

‘아… 이 소리였구나.’

괜히 명기가 아니었다.

2. Roland D-50

영화 같은 공간감을 만든 악기

1987년 등장한 D-50은 디지털 신디사이저의 또 다른 전설이다.

LA Synthesis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만들어 낸 패드와 벨 사운드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최고라고 평가한다.

대표적으로

  • Enya
  • Jean Michel Jarre
  • Enigma
  • 수많은 영화 OST

에서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특히 패드를 한 음만 눌러도 공간 전체가 채워지는 느낌은 아직도 특별하다.

3. Roland JX-8P

따뜻한 패드의 대명사

화려하지는 않다.

하지만 오래 들을수록 매력이 커지는 악기다.

대표곡

  • Europe
  • A-ha
  • Duran Duran
  • Pet Shop Boys

특히 80년대 특유의 따뜻한 스트링과 패드는 JX-8P를 빼놓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대학 시절 다른 학교 공연에서 가장 많이 보았던 Roland 로고도 지금 생각하면 JX 시리즈였던 것 같다.

몇십 년이 지나 내 방에서 직접 그 소리를 듣게 될 줄은 당시에는 상상도 못 했다.

4. Roland Jupiter-8

모두가 꿈꾸던 최고의 신디사이저

Jupiter-8은 당시 최고의 플래그십 모델이었다.

가격도 최고였고 소리도 최고였다.

대표곡

  • Michael Jackson
  • Queen
  • Toto
  • Duran Duran

현재도 천만 원이 넘는 가격에 거래될 정도로 가치가 높다.

지금도 ‘최고의 빈티지 신디사이저’를 이야기하면 빠지지 않는 이름이다.

5. Korg M1

워크스테이션 시대를 연 악기

1988년 등장한 M1은 그야말로 혁명이었다.

피아노, 오르간, 스트링, 드럼까지 모두 한 대에 담았다.

대표곡

  • Madonna - Vogue
  • House Music
  • 90년대 수많은 가요

특히 M1 Piano와 Organ은 지금도 수많은 플러그인이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6. Oberheim OB-Xa

‘Jump’를 만든 그 브라스

Van Halen의 Jump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첫 음만 들어도 알 것이다.

그 강렬한 브라스.

바로 Oberheim OB-Xa다.

대표곡

  • Van Halen - Jump

브라스 사운드 하나만으로도 전설이 된 악기다.

7. Sequential Prophet-5

모든 폴리 신디사이저의 기준

1978년에 등장했지만 80년대 음악을 이야기할 때 절대 빠질 수 없다.

대표곡

  • Peter Gabriel
  • Genesis
  • Toto
  • 수많은 영화 음악

현재도 리이슈 모델이 판매될 만큼 사랑받고 있다.

8. Roland Juno-106

가장 사랑받는 빈티지 신디

패드.

베이스.

스트링.

어느 하나 빠지는 것이 없다.

대표곡

  • A-ha
  • Eurythmics
  • Depeche Mode

지금도 입문용 빈티지 신디를 추천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모델이다.

9. Korg DW-8000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절묘한 만남

1985년에 등장한 DW-8000은 독특한 음색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대표곡

  • New Age
  • Synth Pop
  • 80년대 팝 세션

부드럽지만 힘 있는 소리가 특징이다.

10. Yamaha CS-80

영화 음악의 전설

이 악기를 빼놓고는 영화 음악을 이야기할 수 없다.

대표곡

  • Vangelis - Blade Runner OST

현재는 구하기도 어렵고 가격도 엄청나지만, 그 독특한 표현력 때문에 지금도 최고의 신디사이저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지금도 이 악기들을 구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대부분은 지금도 중고시장에 나온다.

국내 중고나라나 번개장터는 물론이고 일본 야후옥션, Reverb, eBay에서도 활발하게 거래된다.

가격은 수십만 원부터 천만 원이 넘는 모델까지 다양하다.

40년 가까이 된 악기인데도 가치가 유지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 소리를 아직도 완벽하게 대신할 수 있는 악기가 없기 때문이다.

명곡을 다시 듣는 재미

예전에는 노래만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음악을 들으며 이런 생각을 한다.

‘지금 들리는 패드는 D-50일까?’

‘이 전자피아노는 DX7가 맞겠지.’

‘이 브라스는 Jupiter일까, Oberheim일까.’

한 곡을 듣는 재미가 두 배가 된다.

좋아했던 음악을 새로운 시각으로 듣게 되는 것이다.

나 역시 하나둘 신디사이저를 구입하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연주 실력이 늘었다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평생 좋아했던 음악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예전에는 ‘좋은 노래’였던 음악이 이제는 ‘좋은 악기와 좋은 연주가 함께 만든 작품’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혹시 80년대 팝을 좋아한다면, 다음에는 노래만 듣지 말고 그 뒤에서 울리고 있는 신디사이저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보길 권한다.

분명 예전에는 들리지 않던 새로운 음악이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다음 편 예고

“Yamaha DX7, 단 하나의 악기로 어떻게 80년대 팝 음악을 바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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